중국(中國)의 고서(古書)인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진서(晋書) 등에서 동이족(東夷族)에 관한 기록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들 고서(古書)들은 숙신(肅愼)을 비롯해 고대부족시대부터 우수한 동이족이 여러 부족으로 분파·분립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여러 부족으로 분파·분립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진서(晋書)는 숙신(肅愼)이 동이족이고(晋書, 卷97, 列傳, 第67, 四夷), 진서각주(晋書斠注)는
동이(東夷)가 100여국으로 분립했다고 기록했다(晋書斠注, 卷3, 帝紀第3) 그런데
이 진서각주(晋書斠注)에도 잘못 기록한 것을 볼 수 있다.
진서각주(晋書斠注)에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요, 백두산에 거주하며, 순(舜)25년에 궁시(弓矢)를 수출했다고 했다. 중국에 궁시(弓矢)를 수출한 것은 맞으나 숙신(肅愼)을 읍루(挹婁)라고 한 것은 그릇된 것이라는 것은 이미 밝혔다.(晋書斠注 卷97, 列傳, 第67 四夷) 숙신씨(肅愼氏)는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 3대(代)이전에 동북지대에 대국을 건설해 지금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동쪽 모든 지방을 차지했다. 이처럼 숙신씨는 4300년 전 순(舜), 하후씨(夏后氏)시대부터 저명한 대국이었다.
읍루(挹婁)의 명칭은 후한서(後漢書)에 비로소 나오는 숙신씨(肅愼氏)의 영역에 속한 한 부족에서 출발했다. 숙신(肅愼)이 쇠퇴한 후에 숙신씨(肅愼氏)의 영토에 진출한 것이다. 이러한 유래를 모르고 숙신씨의 일명이 읍루(挹婁)라고 하는 것은 큰 오류(誤謬)다. 때문에 진서각주(晋書斠注)는 오사감(吳士鑑)과 유승간(劉承幹), 양인(兩人)이 숙신씨의 일명이 읍루(挹婁)가 아님을 진서(晋書)에 주해(注解)를 가(加)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조선의 후국(侯國)에 대해서도 많은 오류가 나올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 지방 후국(侯國)의 통치제도에 대한 것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한다. 다행히 신용하 교수의 ‘고조선 연구 제1호’0에 발표된 ‘고조선의 통치체제’는 후학들에게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필자도 이 논문에 게재된 내용을 참고로 고조선 지방 후국(侯國)의 통치체제 대한 상황을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
해(奚), 유연(柔然)도 고조선의 후국(侯國)이었다
해(奚)는 원래 동호(東胡)를 구성했던 맥족(貊族)의 하나로 처음에는 ‘고마해(庫莫奚)’라고 했다. 신용하 교수는 여기서 ‘고막(庫莫)’은 ‘고마’ ‘곰’의 한자(漢字) 소리 표기이고 ‘해(奚)’는 ‘해(태양)’의 한자(漢字) 소리 표기라고 그의 논문에서 말하고 있다.(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연구 45면) 이는 맥족(貊族)의 토템이 원래 ‘곰’ 이었기에 ‘고막(庫莫)’이 ‘고마(곰)’임을 알 수 있다.
‘고마해(庫莫奚)’가 오환족(烏桓族)과 함께 오환산을 지키면서 ‘해(태양)’을 숭배했으므로 ‘해(奚)’가 ‘해(태양)’의 한자(漢字)소리 표기임을 알 수 있다. 해족은 5부제도의 군사조직을 만들고 각부에는 ‘일근(佚斤)’이라는 지휘관을 두었으며 군사의 단위는 500명의 무장병(武裝兵)으로 한 진(陣)을 만들었다. 중국은 ‘고마’를 떼어버리고 스스로 ‘해족’(奚族)’이라고 불렀다.(新唐書卷219, 列傳 北狄, 奚傳 參照)
유연족(柔然族)은 원래 동호(東胡)가 흉노의 서기전 206년경 공격으로 해체되자 유연족(柔然族) 잔존세력이 다시 힘을 길러서 부흥한 고조선의 후국(侯國)족이었다. 중국인들은 ‘연연(蠕蠕)’, ‘예예(芮芮)’ 등의 비칭(卑稱) 한자를 붙여 불렀다. 그러나 유연족(柔然族) 자신은 ‘대단(大壇)’ ‘단단(檀檀)’이라고 불렀다. 송서(宋書)는 그 후 강성한 유연족을 묘사해 ‘예예(芮芮)’ ‘대단(大壇)’ 또는 ‘단단(檀檀)’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기동력이 있는 기마(騎馬)족으로 서방(西方)의 통로를 이용해 경도(京都)와 교통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인도문명 등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거리는 3만여 리가 되며, 그들은 당당하게 대호(大號), 황제(皇帝), 가한(可汗)이라고 칭했다. 부민(部民)은 수가 많아서 강력했다고 기록하고 있다.(宋書, 卷95, 列傳, 芮芮傳 參照 / 위 논문45면)
유연(柔然)의 ‘대단(大壇)’이라는 왕족은, 흘승개가한(紇升蓋可汗)이라는 칭호로 제위에 오르고 유연제국(柔然帝國)을 크게 확대했다. 유연(柔然)이 북방의 강대한 제국이 되자 유연에서 아나양(阿那瓖)이 칙련두구두벌(勅連豆丘豆伐 可汗)의 칭호로 제위에 올랐을 때 중국의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는 통혼(通婚) 정책으로 친선을 추구했다.
유연(柔然)의 족명(族名)인 ‘대단(大壇)’은 ‘큰 밝달족’의 뜻이며 당시의 용어발음으로는 ‘아(大)발(檀)’로 읽혔다고 신용하 교수는 밝히고 있다. 또한 ‘단단(檀檀)’은 ‘Tartar'[달(밝달, 달달]라고 발음된 것으로 흔적이 남아 있다. 후에 유연족을 밝달단(白韃靼)이라고도 하고, 이를 다시 달단(韃靼)이라고도 불렀다. 또 Tartar(답탑이, 塔塔爾, 달달 다탈)라고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모두 단단(檀檀)의 한자소리 표기로 해석되고 있다.(이상은 신용하 위 논문82면)
또한 유연(柔然)황제 흘승개(紇升蓋 可汗)는 ‘흘승골’의 작은 강 이름로 그들의 기원을 부여의 흘승골, 흘승개에 연결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유연(柔然)황제 아나양(阿那瓖)의 ‘아나(阿那)’도 ‘아사나’의 준말 한자 표기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유연(柔然)의 왕족은 우리 한민족인 ‘단족(檀)族)’ ‘아사나 족’ 등 고조선 왕족계통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유연(柔然)은 그 후 멀리 유럽으로 이동해서 아발(Avars)족이라는 명칭으로 다뉴브강, 라인강 유역으로 진출해 약 200년간 그 지역을 통치하며 활동했다.
고조선 후국 산융(山戎), 중국 고문헌에도 기록됐다
산융(山戎 원 흉노)은 중국의 고 문헌에는 융(戎), 험윤, 훈죽(葷鬻), 흉노(匈奴) 등으로 기록돼 있는 유목부족이다. 동호(東胡)와 이웃해 서쪽에 연접해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 이전의 호칭은 ‘견이(畎夷)’라고도 기록돼 있다. 원 흉노족의 위치와 상태를 알려주는 기록으로 사마천이 쓴 사기(史記)에는 연(燕)의 북쪽에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각각 계곡으로 분산해 살고 있었는데, 그들에는 각기 군장이 있었고 가끔 백여 개의 융(戎)이 모이는 수는 있으나 한 종족처럼 단결시켜 다스릴 수는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史記, 卷110, 匈奴列傳 參照)
고조선의 서방변경 세력으로서 중국 사가들이 호맥(胡貊)이라고 불렀던 고조선 일파가 서기전 703년 동주(東周) 환왕(桓王) 13년에 연(燕)을 부수고 가로질러 산동반도에 있는 제(齊)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서기전 653년 동주(東周) 혜왕(惠王) 24년에는 연을 공격했다. 이에 연이 긴급하게 구원을 제(齊)에게 청하니 제환공(齊桓公)이 이를 막아 싸워서 구해준 기사로 관중(管仲)이 쓴 관자(管子)에 북으로 영지(令支)를 정벌하고 고죽(孤竹)을 정복하여 산융(山戎)과 맞닿았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영지(令支)와 고죽(孤竹)은 영평부(永平府)부근에 있던 고조선 지배 영역의 일부이었는데 제(齊)가 이를 정복한 후에 산융(山戎)과 맞닿았다고 한 것은 산융(山戎)이 고조선 지배영토 안에 살고 있던 유목민족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상은 신용하 교수 논문 46~47면 참조인용)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중국은 고조선을 견제한 국가로 한(漢)나라를 내세우나 중국이 내세우는
한(漢)나라의 역사도 거의 모두가 허구라는 사실이 입증된다.
당시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한(漢)을 능가하는 강대한 천하를 호령하는 강대한 예맥이 엄연히 존재한 사실을 연구 고찰하면, 중국의 한족집단(漢族集團)이 우리민족의 영토를 엿볼 생각도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예맥은 동주(東周)시대부터 한 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중국에 남출(南出)하여 한족(漢族)을 정벌·정복했다. 강대한 예맥조선은 위만(衛滿)의 상전(上典)인 한고조(漢高祖)를 지원하고 위만을 책동해 배반케 했다. 아울러 예맥조선은 한무제(漢武帝)가 사군(四郡)을 설치하자 26년 뒤 진번(眞番), 임둔(臨屯) 2군을 탈취하고 현토군(玄菟郡)도 대부분 탈취했다. 이는 예맥이 한(漢)나라보다 강대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위만조선, 기자조선도 부각시키고 기자조선 40여대가 계승됐다고 하지만 그 군주의 이름이 역사적 기록에 전혀 없다. 위만조선도 역사적 기록이 거의 없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한 지방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한 미약한 존재요, 한사군(漢四郡)도 3군을 예맥에 빼앗긴 것을 보면 역시 미약한 존재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을 정벌해 거의 멸망케 한 민족이 흉노가 아니고 예맥이다.(准南子, 卷11) (史記34 燕召公, 世家第4) (史記129, 貨殖列傳, 第69, 烏氏倮 등 參照)(다음에 계속)